취미는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설명할 단어가 너무 단조롭게 느껴졌다.
“직장인”, “성실함”, “책임감”, “바쁜 일상” 같은 말들.
남들이 보기에 무난하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틈을 채운 건 ‘취미’였다.

처음엔 그저 여유 시간에 핸드폰을 덜 보려고 시작한 자수였다.
작은 자수 키트를 인터넷에서 주문하고, 유튜브를 보며 처음 실을 꿰고 바늘을 잡았다.
사실 처음엔 재미보단 “뭔가 생산적인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한땀 한땀 실을 넣을 때마다,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생각들이 천천히 정리되는 걸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색, 내가 자주 그리는 모양, 자꾸 손이 가는 패턴을 보며
“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자각했다.

자수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만든 결과물은 너무나 많은 걸 말해준다.

한창 감정이 예민했던 날엔,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색 실을 고르게 되었고
마음이 들떠 있는 날엔 알록달록한 실로 꽃과 별을 수놓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실을 타고 천 위에 내려앉았다.

누군가 "이건 무슨 의미예요?" 하고 물을 때,
나는 그제야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좀 외로웠거든요. 그래서 검정색을 많이 썼어요."

이렇게 취미가 내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언어가 되어갔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었다.
슬퍼도 참았고, 화가 나도 웃었고, 기뻐도 차분하려 애썼다.
늘 “괜찮아요”라는 말로 감정을 눌러왔던 나에게
취미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이 되어줬다.

완벽하지 않아도, 삐뚤빼뚤해도, 실패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그 공간 안에서
나는 진짜 나를 조금씩 꺼낼 수 있었다.

그건 꼭 그림을 잘 그리고, 자수를 예쁘게 놓아서가 아니라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에 이름 붙이는 법을 배웠다
- 자수든 글쓰기든, ‘무엇을 만들기 위해’ 내가 느끼는 것을 먼저 들여다보게 됐다.
하루가 덜 피곤해졌다
- 취미 시간이 생기고 나서, 퇴근 후에도 ‘하루가 끝난 게 아닌’ 느낌을 받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에너지였다.
SNS보다 현실이 좋아졌다
- 예전엔 남의 여행 사진이나 예쁜 그림을 보며 부러워만 했는데,
  이젠 “나도 내가 만든 걸 좋아해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기타를 치며, 어떤 사람은 글을 쓰며 자신을 표현한다.
나에게 그 언어는 자수였고, 어쩌면 곧 **‘나 자신을 좋아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취미는 내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결과물을 잘 만들라고 다그치지 않았고, 매일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있게 옆에 조용히 있어주었다.

취미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그건 내 감정을 설명하는 도구이고,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내 마음을 실, 천, 색깔, 시간이라는 언어로 꺼낼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고요한 위로였다.

앞으로도 자수가 아니더라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를 찾아 나가고 싶다.
그게 뜨개질이든, 그림이든, 글쓰기든.
나는 이제 알고 있다. **“표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걸.

산들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