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들
어느 날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상처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축축 처진다. 나만 그런가 싶어 인터넷을 뒤적이면 “우울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 위안처럼 다가온다.
그럴 때면 나는 서랍 속에 조용히 자리한 실과 바늘을 꺼낸다.
처음 자수를 시작한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SNS에서 누군가의 자수 작품을 보고, ‘나도 해볼까?’ 싶어 주문한 자수 키트가 계기였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와 엉킨 실 속에서도 계속하게 된 이유는 바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자수를 놓는 시간 = 나를 회복하는 시간
자수는 생각보다 느리다. 바늘에 실을 끼우고, 천 위에 작은 도안을 따라 한 땀씩 수놓는다. 정교한 패턴을 따라야 해서 손은 바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은 차분해진다.
특히 우울할 때 자수를 놓으면, 생각이 과하지 않게 정돈된다.
머릿속에서 도는 불안한 생각들이 실을 따라 천천히 흐르듯 가라앉는다.
자수라는 행위는 묘하게 명상과 닮아 있다. 손을 움직이는 반복적인 동작은 생각의 과열을 멈추게 한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느낌이다.
작품을 완성할 때의 작은 성취감
처음에는 단순한 꽃무늬 컵받침이었다. 3일이나 걸려서 완성한 작은 패턴 하나였지만, 완성하고 나니 뿌듯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얼마나 지탱해주는지 몰랐다.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들면, 우울함도 조금은 작아진다.
취미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작은 장치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 30분, 실과 바늘을 잡는 시간
요즘 나는 하루에 30분 정도 자수에 시간을 쓴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샤워한 뒤 작은 탁자에 앉아 천을 펼친다. 이 시간을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부른다.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음악도 틀지 않는다. 가끔은 침묵 속에서, 가끔은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실을 넘긴다. 하루에 아주 조금씩만 진도를 나가도 괜찮다.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니까.
우울할 때마다 이 시간을 지키면 마음이 중심을 잡는다. 누군가에게는 명상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운동이 필요하듯, 내겐 실과 바늘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도 말하던 ‘손의 반복성’
예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손으로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 뇌에 안정감이 생겨요. 뜨개질, 자수, 색칠공부 같은 거요.”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자수를 하며 그 말을 실감했다. 우울감에 빠졌을 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동작’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리고 그 동작이 쌓여 ‘결과물’이 된다는 게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방식이란 것도 알게 됐다.
내가 느낀 진짜 변화
자수를 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분이 가라앉아도, “아, 오늘은 실을 좀 꺼내야겠다” 하고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 전에는 우울한 날이면 그냥 누워만 있었고,
- 무기력함은 더 큰 자책으로 이어졌지만,
- 지금은 바늘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오늘 나를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취미는 그렇게 내 마음을 돌보는 도구가 되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늘이 있다
자수는 내게 특별한 취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자수가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에겐 뜨개질일 수도 있고, 낙서일 수도 있고, 요리나 베이킹일 수도 있다.
우울할 때 꺼내드는 무언가, 마음이 가라앉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소한 습관.
그게 바로 우리를 스스로 회복시키는 힘이 된다.
당신의 실과 바늘은 무엇인가요?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소중히 여겨도 좋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